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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분쟁에서 프랑스가 아르메니아만 편드는 이유, 중세 십자군 원정에서 시작된 아르메니아와 프랑스의 인연

by greengate 2020. 10. 17.

옛 소련에서 나란히 독립한 코카서스산맥 남쪽의 두 나라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교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정확한 피해는 집계가 어렵지만 양측을 합쳐 군 병력만 수백 명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부분의 서방 선진국들이 양측에 똑같이 휴전을 요구하는 가운데 유독 프랑스의 행보만 남다릅니다분명하게 아르메니아 편을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르메니아의 영토는 한반도의 13.5%에 불과하고 인구도 서울인구의 3분의 1에 불과한 작은 나라이지만기독교 역사가 국제사회에서 차지하는 존재감은 작지 않습니다. 로마보다도 앞선 서기 301년에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국가이고,

 구약성경 등장인물인 노아의 방주가 도달한 것으로 알려진 아라라트산(현재는 터키에 속함)을 국가 문장 한가운데 새길 정도로 기독교 색채가 짙은 나라입니다.

이렇게 아제르바이잔 영토내에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인들이 군사 분쟁이 일어나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터키가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하고 있다거나 시리아의 지하디스트가 아제르바이잔군에 가담했다며 이슬람 세력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프랑스가 아르메니아 편을 드는 이유는 끈끈한 양국 간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프랑스와 아르메니아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시발점은 12~14세기 전개된 십자군 전쟁입니다.

 유럽의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할 때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는 킬리키아는 중요한 길목이었습니다.

서유럽 기독교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아나톨리아와 킬리키아로 진군해 들어왔습니다.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인들은 프랑크 십자군(현 프랑스)을 강력한 동맹으로 얻게 되는데,이들의 지휘자인 고드프루아 드 부이용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구원자로 여겨졌습니다.

당시 군주였던 코스탄딘 1세는 이 십자군 원정을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습니다

 킬리키아에 남아있는 동로마의 요새들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킬리키아 지배를 확고히 하려는 계획이였습니다.

 킬리키아에서의 직접적인 군사행동과 안티오키아와 에데사, 트리폴리에 십자군 국가들이 세워지는 등 십자군들의 도움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은 킬리키아를 동로마인들과 투르크족으로부터 벗어나게 했습니다.

또한 아르메니아인들은 십자군을 원조했는데, 당시의 교황이였던 그레그리우스 13세가 그의 로마 교회사에 다음과 같이 저술했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교회와 기독교 세계에 보여준 선한 행동 중에 특히 강조되어야 할 것은,기독교 군주들과 전사들이 성지를 되찾기 위해 나섰을 때, 아르메니아인은 어떤 족속이나 국가도 보여주지 못한 열정과 기쁨, 믿음으로 십자군에게 군마와 식량을 제공하고 인도해 주었다는 것이다. 성전 동안 아르메니아인들은 대단한 용맹과 충성으로 전사들을 도왔다."

 십자군은 그들의 아르메니아 동맹군에게 감사하는 뜻에서 코스탄딘을 백작(Comes)과 남작(Baron)의 칭호로 예우해 주었습니다.

 이후 아르메니아인들과 십자군은 서로 빈번하게 통혼하면서 협력 관계를 강화시켰습니다.

 또한 당시 아르메니아 왕들은 십자군을 도와주는 대가로 프랑스와 무역을 늘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양국 간 인적 교류가 늘어나기 시작해 아르메니아인들이 하나둘 프랑스에 와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17세기에 아르메니아인이 파리에서는 커피숍을, 마르세유에서는 인쇄소를 차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아끼던 보디가드 중에서도 아르메니아 전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19세기에는 교육을 목적으로 프랑스로 이주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아르메니아 이주민 역사를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1차대전 직전까지 약 4000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프랑스에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본격적으로 프랑스에 아르메니아인들이 넘어온 건 1차대전 도중이였습니다.

당시 오스만투르크(현 터키)에 의해 150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집단 학살을 당했고비극을 피해 수만 명이 한꺼번에 프랑스로 이주했습니다.

 2차대전 때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운동에 아르메니아 출신 이주민들이 가담했습니다.

함께 피를 흘리며 동지로서 유대감이 굳어지면서 아르메니아인들이 프랑스 사회에서 뿌리내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연대감은 프랑스에서 오스만투르크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의 부정을 금지하는 아르메니아 대학살 부정금지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법으로 프랑스는 그동안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터키와 등을 돌려 유럽의 견원지간으로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2년에 이법이 제정되자 터키는 발끈하고 나섰습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 부정금지법이 1차 통과한 20111222일에 터키는 프랑스 주재 터키대사관 관계자를 즉각 터키로 불러들여 새 법안 통과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또한 양국 간 군사·정치 협력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많은 터키인들은 대선을 앞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프랑스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 출신 유권자 수십만 명의 표심을 얻으려고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고 생각했습니다.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1945~62, 알제리 독립운동에서 사망한 알제리 국민의 15%는 프랑스에 의해 학살당했고,

 1994년에도 80만 명에 달하는 르완다 국민이 희생됐다며 폭력으로 얼룩진 프랑스의 과거사를 공격했습니다.

 이와 더불어서 터키는 오스만투르크가 아르메니아인들을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굶주림과 질병 등으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뿐 의도적인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볼칸 보즈키르 터키 외교위원회 회장과 오스만 코루튀르크 전 프랑스 대사도 파리를 방문해,

 사르코지 대통령의 외교고문인 알랑 주페, 장다비드 레비트와의 면담자리에서 프랑스 정부의 이번 결정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표출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지금까지 중동의 강자인 터키 정부의 입장은 국제무대에서 80년 넘게 정설로 통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가 아르메니아인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20여개 국가가 프랑스의 뒤를 이어 아르메니아 학살을 사실로 인정했습니다.

 이런 프랑스의 입장은 정권이 바뀐뒤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작년에 매년 424일을 아르메니아 학살을 기리는 날로 정했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곧바로 아르메니아 학살의 날 제정을 주도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을 정치 초심자라고 비판하며 잘못된 결정을 철회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처럼 프랑스는 약 50만명에 이르는 아르메니아계의 표를 의식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터키와의 관계를 악화시키면서까지 이러한 법을 제정한 것을 보면 프랑스의 아르메니아에 대한 연대는 대단한 것처럼 보입니다.

 현재 프랑스인에서 아르메니아계는 약 50만명으로 추정되며 유럽의 아르메니아 사회 중에서 가장 크다고 알려졌습니다

 아르메니아 인구가 300만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규모입니다.

 아르메니아계 프랑스인들은 음악과 스포츠, 문학 등 예체능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들이 많습니다.

 샹송의 전설로 불리는 가수 샤를 아즈나부르가 아르메니아계 프랑스인으로 알려져 있으며1993~1995년까지 총리를 지내고, 1995년 대선에 출마했던 정치인 에두아르 발라뒤르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우승 멤버였던 유리 조르카예프도 아르메니아계 프랑스인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듯 중세시대 십자군 원정에서 시작된 프랑스와 아르메니아와의 인연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어떻게 보면 터키의 세력이 조금 약화되었을뿐, 서방세계의 아랍세계에 대한 십자군 원정은 지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 저는 밀리터리 전문 채널인 '이상튜브'를 운영중에 있으며 이 글의 유튜브에서의 사용이나 다른 블로그에서의 게재를 금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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